일상들/ 기타 알코홀릭 마라톤 alcoholic marathon 2006/06/11 15:04 by toonism

9일(金) 저녁 여덟 시 경,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퇴근했냐면서 술이나 한 잔 하자는군요. 아직 퇴근하려면 멀었다, 다음에 보자 하고 말했는데 기다리겠다는군요. 퇴근하고 학교 앞 술집에 도착하니 대충 열한 시쯤 되었더군요. 대략 열 명 내외의 선수(?)들이 술집 한쪽 구석에 앉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더라구요. 열두 시 반쯤인가 일어나면서 계산을 하는데, 안주도 거의 안 먹고 소주만 먹었는데도 십만 원 돈이 나오더라구요. 이것들 도대체 얼마나 먹은 거냐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0일(土) 오후 두 시 경, 후배에게서 또 전화가 왔습니다. 퇴근했냐면서 또 술이나 한 잔 하자는군요. 이것아 정신차려라, 어제 그렇게 먹어 놓고 또 먹어? 게다가 지금이 몇 신데, 낮술을 먹자는 거냐. 그런데 알고 보니 이것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먹고 있었던 겁니다.

같은날 오후 다섯 시 경, 또 전화가 옵니다. 언제쯤 올 거냐고, 그때까지 기다리겠답니다. 열 시 넘기 전에는 학교 못 간다고 말해 두었습니다. 이 짐승 같고 좀비 같은 놈들과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여덟 시 경, 전화해 보았습니다. 드디어 이 녀석들 혀가 꼬부라진 것 같습니다. 발음도 새고, 피곤이 가득한 그 말투. 세 명은 쓰러져 자고 있답니다. 좀비 녀석들, 드디어 쓰러졌구나.

아홉 시 반 경, 퇴근하던 길에 혹시나 하고 전화를 해 보았습니다. 쌩쌩한 목소리. 빨리 학교로 오라고 난리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부활한 거냐고 좀비 같다고 저주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발길이 학교로 향합니다. 열 시 경 동아리방에 들어가 보니 의외로 주변이 깨끗합니다. 이 녀석들, 내가 학교로 안 올 거라고 생각했는지 마시던 술을 적당히 정리한 후에 내가 사는 집 근처로 가서 한 잔 더 하려고 했다는군요. 대위기였습니다. 저 녀석들이 우리 동네에서;


도대체 지난 밤부터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한 번 물어보았죠.

내가 집에 들어가던 그 때, 일곱 명이 학교 동아리방으로 들어갑니다. 열한 명 중 네 명은 집으로 귀가. 일곱 명은 맥주pet병 네 병을 사들고 올라가 새벽까지 먹었다는군요. 정확히 몇 시까지 먹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숨 자고, 열 시 경에 일어나 보니 일곱 명 중 세 명이 사라져 있습니다. 집으로 직장(!)으로 돌아간 거죠. 네 명이 남아 다시 옹기종기 모여 술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마침 동아리방 바로 옆에 있는 단과대 학생회실에는 2주 전 축제 때 쓰고 남은 소주 한 박스가 있습니다. 단과대 학생회실의 물건은 항상 동아리와 공유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던 후배들은 그 소주 한 박스를 들고 나옵니다. 아침 열 시부터 저녁 다섯 시까지 일곱 시간 동안, 소주 한 박스에서 단 세 병을 남기고 다 들이킵니다.

한 자리에서 너무 오래 마시다 보니 지루했는지 잠시 자리를 옮기기로 합의한 이 녀석들은, 학교 근처에 있는 아우내순대 가게에 가서 삼겹살과 순대국을 안주로 소주를 마십니다. 저녁 다섯 시부터 일곱 시 반까지 술을 마시고 술집에서 나온 녀석들의 발은 아주 자연스럽게 버스 정류장을 지나 교문으로 들어섭니다. 그 누구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다들 아주 자연스럽게 동아리방에 들어갑니다. 두 시간 정도 잠시 휴식을 갖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한 이들은 잠시 취침 모드로 들어갑니다. 이때 내가 전화를 했고, 전 당연히 이들이 쓰러졌을 것이라 생각했던 거죠.

아홉 시 반쯤에 잠에서 깬 이들은 적당히 주변을 정리한 후 다음 술자리를 준비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잠실로 가서 나를 만날 것인지 어쩔지를 고민하면서 말입니다.


이 끔찍하고 처절할 정도의 알코홀릭 마라토너들. 도대체 이렇게까지 술을 마시는 건 누가 주도한 거냐, 이따위 음주 문화는 도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냐 물었습니다. 이 녀석들의 시선이 다들 나를 향합니다. 어이, 이봐.

나는 두려웠습니다. 이 녀석들의 마라톤이, 내가 도착함으로서 다시 시작하는 것일까? 나와 술을 마시고, 또 학교로 올라가 술을 마시고, 한숨 자고 일어나고,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악순환을 끊어야 했습니다. 이 녀석들이 다시는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을 만큼 먹여 주자, 그럼으로서 오늘 다들 집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자. 죽어라 술을 마셨습니다. 후배들도 나를 따라 죽어라 술을 마셨습니다. 소줏집에서 한 시간 만에 팔만 원 어치의 술을 마셨습니다. 이쯤이면 다들 지쳐 집으로 들어가겠지. 이 정도면 성공이야.

그런 후, 우리의 발은 아주 자연스럽게 버스 정류장을 지나 교문으로 들어섰습니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다들 아주 자연스럽게 동아리방에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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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언에일리언 2006/06/11 16:22 # 답글

    ....(유구무언....)
  • 페로페로 2006/06/11 16:23 # 답글

    두렵군요...이야기만 들어도 술냄새가 온 방안에 풀풀 풍기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아닌것 같아요... =.=;
  • Frey 2006/06/11 18:19 # 답글

    ... 그렇게 마시고도 괜찮으십니까?
  • conFrost 2006/06/11 18:30 # 답글

    .... 그야말로 무한루프;
  • 트랜샌드 2006/06/11 22:58 # 삭제 답글

    좌절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되네요. orz
  • syf 2006/06/11 23:14 # 삭제 답글

    ........투니즘님은 사나이.(!?!?!?)

    ................설마 지금도 드시고 계신 건 아니시겠죠?;;(덜덜덜)
  • cain 2006/06/12 22:13 # 삭제 답글

    후배님들이 아주 바람직한 신념을 갖고 계시는군요. *^-^* (퍽)
    오늘 아침에 동아리방에서 출근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 2006/06/13 12:11 # 삭제 답글

    그러고도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군요...(먼산)
  • toonism 2006/06/14 12:10 # 답글

    언에일리언/
    입은 마시라고 있는 거죠. 흐흣.

    페로페로/
    사람 아녜요, 술냄새 풍기는 좀비들이죠.

    Frey/
    그러게 말입니다. 미스터리예요.

    conFrost/
    무한루프;
    루프는 일요일 오전에 종료했습니다. 월요일에는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출근해야 하니까요.

    트랜샌드/
    좌절하실 것까지야; 후훗.

    syf/
    ??
    멤버 중에는 여자도 있었는데요.
    하긴, 걔가 좀 사나이스럽긴 하지요.

    cain/
    월요일 출근은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권/
    인간의 생명이란 이다지도 끈덕진 법이죠.
  • FisH 2006/06/17 12:11 # 삭제 답글

    (후덜덜덜)

    인간의 적응력이란... (먼산)
  • toonism 2006/06/22 00:05 # 답글

    FisH/
    싸이 방명록에 후배가 글을 남겼는데,
    다음번엔 7차에 도전하자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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