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별의 계승자 - ![]() 제임스 P. 호건 지음, 이동진 옮김/오멜라스(웅진) |
21세기 초에, 지구의 위성인 달에서, 5만 년 전의, 우주복을 입은 인간이, 발견된다.
세상에, 이게 말이 돼?
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부 장르는 하드 SF랍니다. 『중력의 임무』를 채 50페이지도 읽지 못하고 던져 버린 이력이 있는 터라 두려움이 앞섭니다. 생물학, 지질학, 수학, 언어학 등 수많은 학문들이 치고받는답니다. 오오, 이거 문과생은 읽으면 안 되는 건가? (그나마 언어학... 아냐, 언 어차피 경상계열과는 무관하잖아!)
『중력의 임무』는 재미 있다는 소문을 듣고 구입한 게 아니라 희귀한 책 모으는 몹쓸 병때문이었으니, 그 책이 내게 맞지 않는 건 어쩌면 예정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인지 『별의 계승자』가 나오고 두어 달이 지나도록 구매하지 못했고, 그냥 주위 사람들의 말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같이 재밌다는 겁니다. 사람들 블로그를 돌다가 <스포일러>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보고 <뒤로 가기> 버튼 누르기를 십수 차례, 이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9월 초에 구하고야 말았지요. 그나마도 김이환 신작 『절망의 구』를 구매하면서 같이 구매한 겁니다. 읽고는 싶은데 한편으로는 두려웠어요. 또 50페이지 읽고 집어 던질까 봐.
걷는 시간 빼고 버스 타는 시간만 해서 출퇴근 각각 10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틈을 이용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규격화된 시간 내에 책을 읽다 보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 게 어이없게도, 『별의 계승자』는 미친 듯이 재밌었습니다. 이 책에서 제일 안 넘어가는 부분은 앞부분 30페이지 가량이에요. 여기만 넘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미친 학문 롤러코스터를 탈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학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데 어떻게 즐기냐구요? 그건 예전에 썼던 『쿼런틴』 감상글을 쵸큼 인용해 보겠습니다.
저는 과학 이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더군다나 양자역학이라면 당연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다는 건지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다 보니, 양자역학을 기초로 한 이 소설 『쿼런틴』을 보면 정신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용 자체를 이해를 못한다는 건 아닙니다. 무예를 할 줄 모르면서 무협지를 보거나 마법을 쓸 줄 모르면서 D&D류 환타지를 본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겠지만...(후략)
소설에서 묘사만 제대로 해 준다면, 무예를 할 줄 몰라도 항룡십팔장이니 타구봉법이니 하는 게 현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는 대충 알 수 있고, 마법을 쓸 줄 몰라도 라이트닝 볼트니 매직 애로우니 하는 게 어떤 역할을 할지는 대충 알 수 있습니다. 그건 SF에서도, 특히 하드 SF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안에서 묘사만 제대로 되어 있다면, 생물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이놈이 이러이러해서 일반적인 척추동물이래요'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고, 지질학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여기는 이러이러해서 옛날에 뭔 일이 발생한 땅이래요'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중요한 건 잘 모르는 무언가에 대한 묘사를 보고 얼마나 상상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인가, 라는 거죠. SF가 과학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어려운 게 아니라, 독자가 아직 상상할 준비를 하지 않아서 어려운 겁니다.
정작 책 내용에 대한 감상글은 안 쓰고 이런 식으로 하드 SF 변호를 하는 이유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 설명하려다 보니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스포일러라고 생각해야 할지 애매해서입니다.
5만 년 전의 인간이 우주복을 입은 상태로 달에서 발견된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수십 수백의 (혹은 전지구의) 학자들이 다양한 학설을 제시하며 설명해 보려 합니다. 이 월인(月人)이 인간은 맞는지, 인간이라면 지금의 인간과는 얼마나 유사한지, 밥은 먹고 다녔는지. 지구에서 온 놈인지(그렇다면 왜 지구에 문명의 흔적이 없는지), 다른 곳에서 온 놈인지(그렇다면 어떻게도 이렇게까지 지금의 인간과 유사할 수 있는지).
수많은 학설이 생겨나고, 그많큼 많은 학설이 폐기됩니다. 그럴싸한 학설이 생겨나면, 그에 반하는 새로운 증거가 발견됩니다.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주위 환경의 변화에서 경이감을 느끼는 게 일반적인 SF라면, 이 이야기에서는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들과 최종적으로 밝혀지는 그 진실 자체에서 경이감을 느끼게 됩니다.
5만 년 전에 달에 묻힌 시체 한 구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태양계의 밝혀지지 않았던 커다란 비밀이 드러나면서 막을 내립니다. 책 말미의 에필로그는 괜히 힘을 빼는 것 같고 불필요해 보이긴 합니다만, 전반적으로 흠을 잡기가 어려운 훌륭한 소설입니다.
게다가 과학적 논쟁을 하는 내용이, 나온 지 30년이 지났는데도 촌스럽지 않다는 건 정말 기적 같습니다.









덧글
winnie 2009/10/15 20:30 # 답글
정말이지 미친듯이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도!!아 지금도 마지막 엔딩의 감동이 저릿저릿~~
toonism 2009/10/16 11:56 #
근데 다시 읽어도 재밌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잠본이 2009/10/21 20:16 # 답글
밥은 먹고 다녔는지 (...)마지막 에필로그는 사족같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징한 감동의 여운이 남아서 눈물이...
(건버스터 엔딩음악과 함께 그 물체가 강으로 떠내려가는거 영상으로 보면 좋겠;;;)
toonism 2009/10/22 09:40 #
아하하... 그 멘트는 나름 신경 써서 넣은 겁니다.(혹여나 제게 하신 말씀이라면... 책이 안 팔려서 밥 사 먹을 돈도 없습니다요;;;)
<이하 스포일러>
마지막 장면은 반칙 같아요. 오파츠에 대한 논쟁은 책 앞부분부터 나왔잖아요.
잠본이 2009/10/22 21:06 #
그래서 저는 그 고고학 탐사단이 본편보다 훨씬 이전 시대에(예를 들면 20세기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발굴했나보다라고 알아서 이해했죠(...)
toonism 2009/10/23 12:56 #
아, 저도 그럴 수도 있겠다고는 생각합니다만...저는 앞부분의 오파츠 논쟁이 '세상에 알려진 진실' 말고 '진짜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읽었거든요.
...그럼 낚인 건가요? ;;;;
yoseobi 2009/11/09 23:04 # 삭제 답글
흠 저도 읽었던 책이죠 첫부분의 설명단계만 지나가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죠. 끊임없이 뒷부분을 상상하면서 읽게 되는 책입니다.
toonism 2009/11/15 09:55 #
저는 그래서, 혹시라도 실수로 아직 읽지 않은 뒷장을 훑어볼까 봐 조심하면서 읽었습니다.